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킴 필비 (문단 편집) == 생애 ==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저명한 아랍 학자 존 필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공부하던 와중에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이때 소련 첩보조직은 [[옥스퍼드 대학교]]와 더불어 영국 엘리트의 산실인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일단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킴 필비를 포함한 5명을 포섭했다. 자서전인 '나의 케임브리지 동료들'에 따르면 이때 [[소련]]의 담당 정보원은 이들 다섯 명에게 급진적 사회운동 조직과 일체의 인연을 끊을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영국의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 뭔가 책 잡힐 게 있어서 출세를 못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버지스나 블런트는 아예 소련을 방문하고 나서 '''소련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킴 필비의 경우 이미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린 것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공산주의자들과 연을 끊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공산주의 비판을 하며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영국 내 나치 지지자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고. 1933년에는 유럽 국가를 순방하면서 [[코민테른]]과 사회주의 지하 조직들 간의 연락원이 되었고 이 때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공산주의자 앨리스 프리드먼과 결혼했다. 이후 귀국하여 자유주의적인 잡지 "리뷰 오브 리뷰스"의 편집장이 되어 소련에게 가치 있는 정보를 출판하였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타임즈의 종군기자로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게 접근하여 '''[[소련]]에 정보를 빼돌렸다.''' 프랑코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코 군대의 전선을 취재하면서 공화파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훈장을 수여받은 경력으로 나름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 정보기관 [[영국 비밀정보부|MI6]]에 들어갔다.[* 이 때 추천해 준 사람이 먼저 [[영국 비밀정보부|MI6]]에 자리잡고 있었던 [[케임브리지 5인조]]의 멤버 중 한 사람인 가이 버지스.] 첩보원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격 사유인 [[말더듬이]]가 있었지만 이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내근요원으로 발령받았다. 1949년에는 [[미국]] [[워싱턴 D.C.]]에 [[영국 비밀정보부|MI6]] 미국 지부 조정관으로 파견되어 [[미국 중앙 정보국|CIA]]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자 공산주의 인맥을 사용하여 소련으로부터 정보를 빼내는 역할을 맡아서 승승장구하며 승진했다. 그러나 실상 가치 있는 정보는 오히려 영국 [[영국 비밀정보부|MI6]]와 미국 [[미국 중앙 정보국|CIA]]로부터 [[소련]]으로 [[이중간첩|줄줄 새어나가고 있었다.]] 친구인 [[도널드 매클린]]과 [[가이 버지스]]의 간첩질이 들통나고 소련으로 망명하면서 1951년 첩보직에서 제외되고 1955년에는 [[영국 비밀정보부|MI6]]에서 해임되어 다시 언론인이 되었다. 이후 결국 [[미국]]에서 [[소련]]의 비밀통신을 [[감청]]하고 암호를 해독해 내면서 꼬리가 밟혔으나 1963년 [[베이루트]]를 거쳐 유유히 [[소련]]으로 망명한 후 [[KGB]]에서 새로 일자리를 얻고 [[대령]]까지 진급했다. 말년에는 [[안드로포프]] 서기장의 대외정책상담역으로 활동하면서 회고록까지 출판하는 등 끝까지 [[영국 비밀정보부|MI6]]를 엿먹이다가 천수를 누리고 1988년 세상을 떠났다. 필비의 장례식은 소련의 당, 정, 군 최고위 인사가 모두 참여한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소련]]에서는 그의 얼굴을 집어넣은 기념[[우표]]까지 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